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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청소년

2021년 봄호
청소년이 힘들 때
국번없이 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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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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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시간
박성희
박성희

따뜻함을 기다리며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아들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 항공편이 취소되었어요. 이유는 모르겠고 대체 항공편도 없어요.”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내가 말했다.
“그래, 다음 비행기는 언제 있어?”
“모르겠어. 하지만 계속 알아볼게요.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짧은 몇 마디의 통화가 끝나고 나는 애써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서 울고 또 울었다.
대학생 아들은 교환 학생으로 터키의 이스탄불에 나가 있었다. 넓은 세상 경험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던 아들은 군대 제대 후 복학해서 터키로 떠나기 전까지 일 년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으고, 여행하고 싶은 곳을 찾아보고 알아보기도 했다. 그렇게 준비해서 떠난 것이 지난 해 1월 22일이었다.
이스탄불에서 아들이 전해오는 일상들은 소소했다. 함께 떠나 가까이에서 생활하고 있는 친구들과 호기롭게 현지 시장엘 갔으나 생각만큼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는 얘기, 사서 가지고 온 것들로 함께 만들었다는 음식 사진, 터키 명소 어디라며 간단한 설명을 곁들인 사진들. 그리고 어느 날엔 고대하던 손흥민 선수를 직접 보겠다고 찾아간 런던의 토트넘 스타디움에서 그 감동을 전한다며 보낸 영상까지 모두가 소소했다. 3월이 되어 새로이 시작되는 학교생활이 즐겁고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며 그들이 우리나라의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뿌듯하다 했다. 모든 것들이 소소하고 세상은 일상의 둘레 안에서 울고 웃고 하는 것 같았다.
그즈음 갑자기 세상이 소란스러워졌다. 어떤 바이러스가 세상을 휘저어 버렸다. 지난해 말쯤 중국에서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퍼져나가 감염자가 속출한다는 것을 뉴스를 통해 들었고, 1월에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감염자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몇 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그런 정도의 것이라 생각했다. 2월이 되면서 이 바이러스는 대구에서 폭발적인 감염 증가로 우리나라를 술렁이게 했다. 사람들은 놀라며 움츠러들었고, 한국발 항공기의 입국을 제한하는 나라들이 늘어갔다. 하지만 그때에도 몇 달만 지나면 다 가라앉고 괜찮아질 줄 알았다.
아시아 몇 나라의 일인 줄 알았던 그 바이러스가 미국과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다. COVID-19 혹은 코로나19란 정식 명칭까지 부여받은 이 바이러스는 세상을 집어삼킬 듯 맹위를 떨치며 곳곳에서 감염자와 사망자들을 속출시켰다. 세계 곳곳에서 넘쳐나는 환자들을 의료시설들이 감당하지 못해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폭증하는 시신을 미처 수습하지 못해 방치 상태란 뉴스도 있었다. (아들이 있던 터키에서도 며칠 만에 수천 명, 수만 명의 확진자가 쏟아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제대로 알게 되었다, 이 바이러스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전파력과 감염력이 얼마나 위험하고 치명적인지를. 여태껏 경험해본 적 없는 이 위력에 놀란 각국 정부는 빗장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자유롭게 통과하던 국경을 폐쇄하고, 항공기 운항을 막고, 나라 안에서도 지역 간 이동을 봉쇄하고 심한 곳은 허가 없이는 집 밖을 나설 수 없는 곳도 있었다.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감염으로 앓는 사람들, 결국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 나도 저렇게 될지 모른다며 두려워하는 사람들. 그리고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이나 공부를 위해 멀리 떠나있던 사람들. 갑자기 막혀버린 하늘 길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혼란을 넘어선 혼돈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혼돈의 한 가운데 나의 아들이 서게 되었다.
우리나라 각 대학에서는 교환 학생으로 나가 있던 재학생들에게 돌아오라 했고 아들의 학교에서도 그랬다. 돌아오면 학사 일정을 포함한 모든 행정 절차를 지원하겠지만 항공편은 어쩔 도리가 없다 했다. 이스탄불의 영사관에 문의하고 부탁했지만 이곳에서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면 필요한 절차를 다 지원하겠지만 항공편은 도리가 없다 했다. 그렇다. 비행편이 없다. 인터넷을 다 뒤져도, 여행사에 직접 알아봐도 항공권을 구할 수가 없다.
‘어쩐다. 내가 날아가서 데려올 수도 없고.’
속이 타고 애가 끓는다.
며칠이 지나고 항공권을 구했다는 연락이 왔다. 터키와 한국 간의 직항 노선은 이미 끊어져 버렸고 싱가포르나 카자흐스탄 같은 주요 경유지의 공항도 폐쇄되었지만 카타르의 도하를 경유해서 들어오는 노선의 표를 어렵사리 구했다 했다. 그 순간은 하늘에도 감사하고 땅에도 감사하고 부는 바람에도 감사했다. 열흘 정도 남은 탑승일까지 일 년 같은 하루를 보내며 기도했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시간이 흘러 이틀이 남았다. 나는 아들이 돌아오면 지낼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항공편이 취소되었어요. 이유는 모르겠고 대체 항공편도 없어요.”
세상이 무너진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애써 마음을 누르며 다른 비행편을 계속 알아보라 했고, 정 안되면 그곳에서 몇 달 기다리며 방법을 찾아보자며 침착한 척 했지만, 통화가 끝난 후 나는 한참을, 아니 아주 오랫동안 그저 울고 또 울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얼마나 울었을까? 문득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약해지면 이 기운이 아들에게 그대로 전해질 것 같았다. 눈물을 닦았다. 다시 방을 정리했고 기다렸다. 나보다 더 힘들 그 아이를 위해 재촉해 묻지 않고 연락을 기다렸다. 다행히도 아들이 혼자가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라는 것에 감사하며 기다렸다.
며칠 후 다시 연락이 왔다. 일주일 후 탑승 항공권을 구했다 했다. 다시 기다림의 시간이다. 이번에는 하루가 십년 같다. 십년 같은 하루, 평생 같은 일주일이 가고 탑승일이 되었다. 한 시간이 일 년 같다. 드디어 문자가 왔다, 공항에 도착했고 출발 시간은 몇 시간 지체되었지만 곧 출발한다고. 이제 남은 것은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뿐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출발 열 시간을 남기고 터키 정부에서 모든 국제선 항공 운항을 중단한다는 발표를 했고, 갑작스런 발표에 놀란 아이들은 고심과 의논 끝에 일단 공항으로 가보자고, 들어 온 비행기는 나가야 하지 않겠냐며, 공항이 폐쇄되었으면 그때 다시 생각하자며 이스탄불 공항으로 향했다 한다. 그리고 섣불리 한국의 부모님께 알리지 말자는 약속도 했다 한다. 공항에 도착하니 무장 군인들이 공항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아이들의 예상대로 공항에 들어와 있던 비행기에 대해서는 운항을 허가해 주었다 한다.)
다음 날 인천공항으로 아들을 데리러 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해외 입국자에 대한 방역 지침이 엄격한지라 접촉자를 최소화하려고 나 혼자 갔다. 한참을 운전하다 잠시 휴게소에 들릴 생각을 하던 차에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가 온다는 것은 비행기에서 내렸고 공항에 도착했다는 얘기다.) 받아보니 공항마다 이용 승객이 워낙 적다 보니 두어 시간 늦게 출발한 비행기가 두어 시간 일찍 도착했다는 것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해외 입국자들은 정해진 버스나 열차를 이용하지 않을 경우, 마중 나온 차량이 정확히 확인되어야만 공항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일요일이라 차가 많이 막혀 내리 네 시간을 운전하고서야 인천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 후 공항 직원이 보내준 좌표 지점으로 찾아가니 직원이 나와서 내 차량 번호를 확인하고서 아들을 내보내 주었다.
아들이 왔다.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다. 손을 뻗으면 금방 안을 수 있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아들의 눈은 웃고 있었고 그 눈에 비친 나의 눈도 웃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나는 손짓으로 아들에게 뒤돌아서라 하고 준비해간 소독제를 아들과 짐에 뿌렸다. 그리고 새 마스크를 건넸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우리는 각자 마스크를 쓴 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도 힘들었다. 가는 길 네 시간, 오는 길 세 시간 휴게소 한번 들리지 못해 몹시 피로했고, 야간 운전이라 눈이 아프고, 한 시도 벗을 수 없는 마스크에 속이 답답하고 머리도 아프고. 하지만 괜찮다, 뒷좌석에서 잠들어 있는 저 아이가 돌아왔으니.
집으로 돌아오고서도 기다림의 시간은 계속되었다. 2주간 자가격리를 해야 했다. 방역 지침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그것이 최선이었다. 집에 도착한 아들은 기다리던 아빠와 누나에게 마스크 위의 눈으로만 인사하고 신고 온 신발까지 급히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그 신발은 2주의 격리가 지나서야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화장실이 딸린 안방에서 아들은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고 나는 밖에서 먹을 것이며 입을 것들을 아들과 다른 가족들 것이 섞이지 않도록 해야 했다. 식사나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서 방문 앞에 두고 문자를 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면 마스크를 쓴 아들이 살며시 문을 열고 그것들을 들여갔다. 내놓을 때도 문자로 미리 내게 알려 멀찌감치 떨어져 있게 한 후에 살며시 내놓았다.
참 낯선 상황이다. 아프면 옆에서 밤새 간호하고, 사랑한다며 눈 맞추고 안아주던, 여태껏 알고 해오던 방식이 아니다. 당황스럽고 힘들지만 받아들이고 기다려야 했다. 혹여 느슨함으로 그 경계가 무너지면 우리 가족 모두가 무너진다는 긴장감으로 아들도 나도 최선을 다해 견디며 기다렸다. 때때로 차를 두 잔 준비해 방 안의 아들과 거실의 내가 같은 시각에 마시며 전화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참 좋았다. 그 시간들이 힘이 되어 2주가 지나고 자가격리를 끝낸 아들이 나왔다. 방 밖으로 나왔다. 잠시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들은 웃고 있었고 그 눈에 비친 나도 가만히 웃었다. 아들을 꼭 안았다. 따뜻했다. 다시 안아본 아들은 참 따뜻했다.
2학기가 되면서 아들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 학교에 다니고 있고 세상은 여전히 코로나19의 위력 아래에 있다. 우리 사는 모습이 참 많이 바뀌었다. 일상을 잃었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어떨 때는 어떤 것이 일상인지 헷갈린다. 마스크를 쓰고, 사람 만나는 것을 피해야 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나 싶다,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 거리두기란 것이 방역 측면에서는 더 없이 효과적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살이나 정으로 볼 때는 참 서운한 것이다. 가혹하다는 생각도 든다.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들, 보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과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이 못내 서운하고 가혹하다. 왜 이래야 하나 싶고 무시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한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잡는다. 기다려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급해하며 성급히 몸이 움직이다가는 자칫 소중한 것들이 다치고 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뜻함을 기억한다. 기다리고 견뎌내서 다시 아들을 안았을 때의 그 따뜻함을 기억하고 있다. 힘든 시간들을 지나고 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어디가 끝인지 보이지 않는 길고 힘든 시간들이지만 그때의 따뜻함을 기억하며,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그 따뜻함을 함께 나눌 때를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나의 자리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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