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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지도연구원

대전청소년

2021년 봄호
청소년이 힘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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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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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도 함께
이혜경
이혜경

엄마 왔다

묵은 짐을 치우다가 먼지 앉은 캠코더가 눈에 들어온다. 영상이 재생되지 않아 장롱 구석에 밀쳐둔 채 잊고 있었다. 먼지를 털어내고 혹시나 싶어 작동 버튼을 누르니 거짓말처럼 불이 켜진다.
오랜만에 불러낸 화면에 낯익은 얼굴이 나타난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모양새가 둘째의 두 돌  무렵인 것 같다. 저 아기가 올해 중학생이 되었으니 꽤 오래된 장면이다.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나는 보이지 않고 아빠와 밖에서 놀고 있다. 아기가 혀 짧은 목소리로 쫑알쫑알 이야기를 쏟아내는 동안에도 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갑자기 시선이 한 곳을 향하더니  벙그러진 꽃봉오리같이 환하게 웃는다.
"엄마 왔다!"
엄마가 오는 것을 저렇게 반가워할 때가 있었다니 새삼 신기하다. 엄마를 통해 세상을 보고, 엄마가 전부였던 천진난만한 모습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화면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십 년의 간격만큼 마음의 간격도 멀어진 느낌이다. 안아달라고 매달리던 귀여운 아기가 지금은 애정 표현을 하면 닭살 돋는다고 손사래를 치는 까칠한 소녀가 되었다. 용돈 준다는 말 외에 나머지는 다 잔소리로 변환해서 듣는 별난 재주도 장착했다. 부쩍 머리가 굵어진 아이를 키우며 품 안의 자식이라는 말을 톡톡히 실감하는 요즘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간절히 원했던 임신이었고, 테스트기의 선명한 두 줄을 보며 떨리고 흥분해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열 달 내내 뱃속의 아이 얼굴을 상상하면서 십 킬로그램 넘게 불어난 몸이 힘든 줄도 몰랐다.
기다림 끝에 드디어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서 엄마로서의 본격적인 라운드가 펼쳐졌다. 아이로 태어나 소녀로 자라고 여자가 되는 과정을 거쳐 비로소 엄마가 된 것이다. 단순한 모양새의 ‘엄마’라는 두 글자는 알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심오하고 복잡한 글자였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크고 무거운 새 보따리가 얹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나는 용감하게 두 아이의 엄마가 되는 선택을 했다.
예전에는‘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같은 진부한 드라마 대사는 하지 않는 쿨한 엄마가 되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육아는 생각처럼,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도 닦는 마음으로 머리끝까지 솟아오르는 열을 식히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지 알아?”라는 말이 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쿨한 엄마의 근처에도 못 가보고 화산 폭발이나 안 하고 넘어가면 다행이다.
한 술 더 떠서 누구네 집은 말만 하면 뭘 사주고, 누구네 엄마는 잔소리를 안 한다며 투덜거리면 철없는 소리는 넣어두라고 윽박지르면서도 조금 뜨끔하다. 본인이 엄마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낳아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덜컥 세상에 나오게 됐으니 아이 입장에서 억울한 마음도 생길 것 같다. 나도 저 나이 때는 좋은 일은 내 덕, 나쁜 일은 엄마 탓을 하며 억지를 부리며 지냈으니 말이다. 얼마 전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내뱉는 혼잣말을 듣고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했다. “엄마가 되어도 엄마를 못 따라간다.”
딸을 키우는 엄마로 산 지 십수 년이 훌쩍 지났어도 나는 여전히 우리 엄마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의 발뒤꿈치만큼도 따라가지 못하는 딸이다. 가끔 엄마의 호출을 받고 친정에 가서도 나는 아이들 밥 시간이 늦겠다며 얼굴만 잠시 비추고 보따리를 냉큼 들고 집으로 온다. 엄마는 서운해하기는커녕 얼른 식구들 밥 챙기라며 재촉한다.
그러면서도 사춘기 딸의 철없는 말과 행동에는 섭섭한 마음이 드니 나는 아직도 갈 길이 한참 먼 부족한 엄마다. ‘내리사랑’이라는 말 뒤에 숨어 지낼 수만은 없는 적지 않은 나이가 되었는데도 엄마라는 단어의 무게가 여전히 버겁다. 아이가 성장할수록 내 역할도 달라져야 하니 날마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엄마를 배워가는 중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 내가 잠시 외출을 하면 어김없이 집에서 전화가 왔다. 언제 돌아오냐고 묻는 전화였다. 곧 들어간다고 해도 참지를 못 참고 연거푸 전화를 해댔다. 요즘도 나가서 볼일을 보고 있을 때 전화가 온다. 언제 집에 오느냐고 묻는 내용도 같다. 그러나 같은 질문이라도 그 의도는 정반대다. 잠시라도 제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도착 시간을 확인하는 염탐하는 의미의 전화다. 늘 옆에 데리고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빨리 커버렸을까.
오늘은 예상보다 일이 빨리 끝나서 아이에게 알려준 시간보다 일찍 집에 도착했다. 이대로 들어가면 자유 시간이 줄었다고 탄식을 할 것이 뻔하다.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라도 들고 왔으니 조금 낫지 않을까 기대하며 현관에 들어선다.
“엄마 왔다, 떡볶이도 왔다”

기고자 소개

이혜경

《수필세계》 신인상 등단

천강문학상 수필부문 대상(2017)

대구일보 전국수필대전 금상(2018)

동서문학상 수상(2018)

부산수필문인협회 ‘올해의 작품상’(2018)

수필집 《각도를 풀다》(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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