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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지도연구원

대전청소년

2020년 여름호
청소년이 힘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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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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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글밭
김회직
김회직

다이어리 시집

새벽 다섯 시가 얼추 되나 싶으면 대문 안쪽에 지그시 밀어 넣고 간 신문을 주워오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뒤에서 두 번째 쪽 <시가 있는 아침>을 펼친다. 펼치는 손동작이 이제는 아주 자연스러워졌다. 일직선으로 내려앉는 시선, 먼저 한 소절씩 눈으로 읽는다. 다시 한 번 입술을 달싹이며 눈과 입으로 읽어간다. 이번에는 작은 소리를 내어 또 한 차례를 더 읽는데 이때는 눈과 입, 심지어는 내 목소리를 내가 들어보는 귀까지 동원한다. 그렇게 세 번씩을 읽어야만 뭔가 잡히는 듯했다. 그러나 어떤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이해가 헝클어져서 십 수 번을 되짚어야 겨우 그 속뜻을 알아챌 때도 있다.
고등학교 시절, 시를 쓴다며 무작정 덤벼들던 경험은 있었어도 정작 시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공부해 본 적이 없으니 내게는 시가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늘그막에 와서 그때 못했던 시문학을 공부하겠다며 다른 읽을거리 제쳐두고 생뚱맞게 시를 먼저 찾으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가볍고 기분 좋게 열려야 할 하루가 심란한 정치싸움이나 복잡한 사건 사고 기사에 눌려 새벽부터 무겁고 찜찜해지는 것이 싫었을 따름이다.
“세상이 어째 이리 돌아가는지 모르겠네. 만났다 하면 그저 쌈질이나 해대니 원….” 작년 여름이었을 게다. 신문을 펴볼 것도 없이 내동댕이친 일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때 엎어져있던 신문 맨 끝장을 넘겨본 것이 시 읽기를 계속하게 된 동기가 아니었나 싶다.
칼럼, 사설 등 읽을거리가 늘비한 속에서 <시가 있는 아침>이 왜 먼저 눈에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너무 시끄러워서일까? 아니면 하는 소리마다 자기 입장만을 내세우는 이기적 돌출발언에 멀미를 느껴서일까? 아무튼 그 비슷한 이유들로 해서 난데없이 시를 읽게 되었는지 모른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였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저게 저절로 둥글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저 안에 땡볕 두어 달/저 안에 초승달 몇 낱.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낱말이었다. 시제인 대추 한 알이 우선 그랬고 거기에 태풍, 천둥, 벼락, 무서리, 땡볕, 초승달이 그랬다. 의지와 인내를 되새김질하는 고달픔을 대추나무에서 찾아내려는 수줍고 겸손한 시, 손을 뻗으면 금세라도 뭔가 잡힐 듯 가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대추나무를 키워본 사람은 대추 한 알의 소중함을 안다. 대추나무빗자루 병에 걸린 대추나무는 꽃망울이 없다. 꽃이 없으니 대추가 열릴 리 없고, 대추가 없으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가 되어버려서 당장 베어내야 한다.
대추 안 열리는 나무를 대추나무로 인정할 수 없듯이 한번 읽혀진 신문도 신문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렸다며 신문지라는 폐휴지로 금세 이름이 바뀐다. 신문 보는 시간이라야 기껏 삼사십 분 남짓, 그것도 시큰둥한 기분으로 스치듯 훑어보고는 곧바로 쓰레기 취급을 해버리는 날이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어렵게 만들어진 신문이나 신문제작에 종사한 여러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어려운 과정을 거치기로 한다면 대추 한 알이나, 신문 한 장이나 거의 비슷할 테지만 어차피 버려지는 신문을 그냥 내쳐버릴 게 아니라 기왕이면 그 중에서 한가지만이라도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취하는 것이 덜 미안할 듯싶었다.
시를 택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읽은 시는 가위로 오려내서 철지난 다이어리에 붙여나갔다. 다이어리는 두 세장 건너 한 장씩 뜯어내서 쪽수를 삼분의 일쯤으로 줄였다. 그래야만 시를 다 붙였을 때 책의 부피가 제 모양을 유지할 것 같아서다.
그렇게 스크랩한 시를 양면에 한 편씩 붙여서 59장, 모두 118편의 시와 짧은 해설문에 시화까지 곁들인 훌륭한 다이어리 시집이 만들어졌다. 시집도 시집이지만 118편의 시를 세 번씩 읽어 모두 354번 이상을 읽었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더 대견스러운 일이었다. 멀리 생각되던 사람도 자주 만나면 가깝게 느껴지는 것처럼 시도 역시 마찬가지여서 자주 대하고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의미파악이 부드러워졌다.
신문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게 안타까워 스크랩하기 시작한 시, 돈 안 들어가는 다이어리 시집 만들기는 신문구독을 멈추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다. 올해 들어 벌써 40여 편의 시가 또 한권의 다이어리에 수집되고 있다. 표지에 <시를 읽는 아침>이라고 써서 붙였다. 책 모서리에도 그렇게 써 붙였다. 서가에 꽂아놓았을 때 이 책은 예사 다이어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먼 훗날 여러 권의 다이어리 시집이 후손에게 전해지고, 혹시라도 나처럼 시집을 만들면서 시를 읽는 후손이 있어준다면 내가 시작한 이 다이어리 시집 만들기야말로 우리 가정의 훌륭한 문화유산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바라건대 그런 후손이 나와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나 혼자만의 욕심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참 좋겠다

기고자 소개

김회직

서라벌예술대학, 원광대학교 대학원 졸업

문학세계 등단

개인전 6회, 초대 및 단체전 370여회 출품

한국미술협회 논산지부장 역임, 중등교원 퇴임

한국문인협회, 대전수필문학회, 논산문학회회원

수필집 『목요일에 만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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