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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상인에서 민족의 스승이 된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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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야 놀자
신현배
신현배

큰 상인에서
민족의 스승이 된 이승훈

남강 이승훈은 15세에 장가를 들어 놋숟갈을 팔러 다니는 보부상이 되었다. 그는 상인들을 따라 평안도 정주 지방에서 열리는 각 시장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장사를 했다. 놋숟갈 짐은 60킬로그램이 넘어 엄청 무거웠다.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장사는 잘 되지 않았다. 근처에 유기 공장이 많아 유기 장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승훈은 황해도의 안악ㆍ재령ㆍ신천 등지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시작했다. 이곳은 농사가 잘 되는 곡창 지대여서 살림이 여유가 있었다. 게다가 유기 장수들이 이곳까지 오지 않기 때문에 이승훈은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다. 유기가 금방 동이 나 더 많은 유기를 지고 와야 했다.
이승훈은 유기 장사를 하며 목화 장사까지 했다. 해마다 목화를 잔뜩 사들여 평안도에서 팔았는데,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1887년 이승훈은 24세가 되었다. 많은 돈을 벌자 이제는 더 큰 장사를 하고 싶었다.
‘보부상을 그만두고 유기 상점과 유기 공장을 차리자. 유기 공장까지 세우려면 큰돈이 필요한데 돈을 어디서 빌리지?’
평안북도 철산에는 평안도에서 가장 큰 부자인 오희순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오희순은 평안도의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고 있었다. 이승훈은 오희순에게 돈을 빌려 유기 공장을 세웠다. 그의 유기 공장은 다른 유기 공장들과 확실히 달랐다. 이승훈은 공장 건물을 지을 때부터 근로자들을 먼저 생각했다.
‘근로자들이 건강하게 일하려면 공장에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해야 한다.’
이승훈은 작업 환경을 따져 공장을 짓고, 근로자들에게는 깨끗한 작업복을 입고 일하게 했다. 근로자들을 따뜻하게 대해 주었으며, 하루 8시간 일하고 휴식 시간을 많이 주었다. 또한 다른 공장들보다 임금을 두 배나 더 주었다.
“정신 나간 사람 아니야? 임금을 한 냥만 줘도 고분고분 일하는데, 왜 두 냥이나 주는 거야? 그렇게 근로자들에게 인심 쓰다가는 오래 못 가지. 공장 문을 닫게 될걸.” 다른 유기 공장 주인들은 이승훈이 곧 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 예상과는 달리 이승훈의 공장은 오히려 더 잘 되었다. 근로자들이 더욱 열심히 일하니 이승훈의 공장에서는 품질 좋은 유기를 많이 만들어 냈다. 다른 공장에서 하루에 100개를 만든다면 그의 공장은 하루에 200개를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평양에 지점을 설치할 만큼 이승훈의 유기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평양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진 청나라 병사들이 달아나는 길에 이승훈의 공장이 있는 납청정에 들러, 그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듬해 5월, 덕천 산골로 피난 갔다가 돌아와 보니 집, 상점, 공장이 모두 파괴되어 버렸다. 건물을 불태우고 물건을 모두 훔쳐 가 버려 놋그릇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참으로 허무하구나. 내 젊음을 바쳐 이루어 놓은 것들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해 버리다니. 오희순 영감에게 진 빚만 남아 있구나.’
납청정 유기 마을에는 오희순에게 빚을 얻어다 쓴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상점과 공장이 파괴되어 빚을 갚을 길이 없자 하나 둘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러나 이승훈은 아무리 망했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나를 믿고 돈을 빌려준 분 아닌가. 상인이라면 신용이 있어야지. 나의 형편을 말하고 용서를 구하자.’
이승훈은 오희순에게 진 빚과 이자를 계산해 그 명세서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오희순을 찾아가서 명세서를 내밀며 말했다.
“난리 때문에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르신께 진 빚은 나중에 반드시 갚겠습니다.”
오희순은 명세서를 들여다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평안도 땅에서 나한테 빚을 얻어 쓴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그런데 전쟁통에 손해를 보고 내게 찾아와 사정을 말한 사람은 자네밖에 없네. 장사를 하려면 자네처럼 신용이 있어야지.”
오희순은 벼루를 꺼내어 붓에 먹을 듬뿍 찍었다. 그러더니 그 붓으로 명세서 위에 열십자로 가위표를 죽죽 그었다.
“이 돈은 없는 것이니 잊어버리게. 자네도 이제 장사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겠지? 내가 또 돈을 대줄 테니 다시 한 번 시작하게.”
오희순은 이승훈에게 2만 냥을 빌려주었다. 이승훈은 그 돈으로 유기 상점과 유기 공장을 세웠다. 납청정에는 다른 유기 상점과 유기 공장이 없어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리하여 큰돈을 벌 수 있었다. 평안도에서는 이승훈이 만든 유기를 쓰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 뒤 이승훈은 유기뿐 아니라 석유ㆍ양약ㆍ종이ㆍ도자기ㆍ잡화 등 여러 물건을 사고 파는 무역상이 되었다. 그는 조선의 큰 부자가 되어 그가 벌어들인 돈이 자그마치 70만 냥이었다. 당시 소 한 마리에 한 냥이라고 하니 소 70만 마리 값이었다. 근래 기준으로 3조 원 가까이 되는 엄청난 돈이었다.
그러나 이승훈은 1904년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하는 장사마다 실패했다. 그리하여 기운을 잃고 2년 동안 고향에 내려가 지냈다. 1907년 봄이었다. 평양을 찾은 이승훈은 모란봉에서 개최된 시국 강연회에서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들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물리치려면 힘을 길러야 합니다. 힘을 기르려면 새로운 교육을 하여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연설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은 이승훈은 상투를 풀어 머리를 깎았으며 술과 담배를 끊었다.
‘그래, 우리가 살 길은 교육을 통해 힘을 길러 나가는 것이다.’
이승훈은 이때부터 교육 사업과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고향에 돌아가 강명의숙과 오산학교를 세웠으며, 3ㆍ1운동 때는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큰 상인에서 민족의 스승으로 변신한 이승훈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이승훈이 세상을 떠난 것은 1930년 5월 9일 새벽 4시였다.
“내가 죽으면 시신을 땅에 묻어 썩히지 말고,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게 하라.”
그러나 그의 이 유언은 일본 경찰의 방해로 지켜지지 못했다

기고자 소개

신현배
시인, 역사 칼럼니스트
1986년 조선일보,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1983년 창주문학상, 2012년 소천문학상 수상
저서 :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외 다수
시집 :
<매미가 벗어 놓은 여름>, <햇빛 잘잘 끓는 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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